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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장기의 기원과 역사
장기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4000여년전 고대 인도의 서북부(현재 파키스탄에서 성행하던 차투랑가 (chaturanga)로 보고있다..차투랑가(chaturanga)란 고대인도어인 범어(梵語,sanskrit)로서 chatur는 넷(四,four), anga는 원(員,member)의 뜻인데, 즉 4원이란 군대의 구성원인 상(象,elephants), 마(馬,horses), 차(車,chariot), 보병(步兵,soldiers)의 4가지로 이는 결국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졸부대로 이루어잔 전군(全軍)을 뜻한다.
고대 인도를 기원으로 하는 차투랑가는 6세기경 서쪽 페르시아에서는 "샤트란지"이르으로 행해지며, 7세기경 페르사아를 정복한 아라비아에 전해지며, 이것이 다시 터키, 스페인을 경유하여 전 유럽에 널리퍼져 오늘날 유럽과 미주에서도 널리 행해지는 체스(chess)가 되었다. 체스란 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하는 샤(shah)에서 온 말이다.
한편, 동쪽으로는 미얀마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오늘날 상기(像棋)라 불리는 중국장기가 되었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서는 한국장기가 되었다.
또한 제3루트(동남아)를 거쳐 일본에서는 쇼우기로 불리는 일본장기가 되었다.
차투랑가는 각기 그나라의 풍속이나 민족성에 따라 각각 특이한 기물과 대국방식이 생겼다고 보는데 서양에서는 체스로 통일되어 있으나,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특성이 다른 장기가 발전되었다. -
02. 장기에 얽힌 이야기
앞에서 언급찬 바와 같이 장기는 조선조에 가장 성행하였다. 연려실기술 1편에 보면 "방간 지란 때에도 모사 박포는 회안군 방간의 집에서 서로 박희와 있을 때 마침 비가 내렸다. 옛말에도 겨울비는 해로운 비라 하였으니 그 조짐이 좋지 않다 하여 장기만 두고 모의는 그만 포기하자 하였으나 방간은 고집을 부리고 일을 모의하다 그 뒤 골육상쟁으로 결국 패하고 말았다" 고 적혀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아 당시 왕자의 집 사랑에까지 장기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흥은 이 성계의 고향으로 그가 아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후 그를 회유하러 온 태종의 신하들을 모조리 활로 쏘아 죽여 함흥차사란 말로 유명한 곳이다.
그 후 이 성계의 옛친구인 박 순이 이 성계를 찾아가며칠을 장기로 그와 즐기며 상왕의 마음 을 달래고 돌아오는 길에 용흥강 어귀에서 뒤따른 무 리들의 칼을 맞아 죽고 만다 장기를 좋아하던 사람의 운명이 었다고 하면 약간 과장된 비유라고 할까?세조의 충신이던 흥 윤성은 당당한 일등 공신의 무 인이었지만 장기 두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장기 두는 사람만 보면 잡아다가 장형을 가하면서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꾸짖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가 장기를 배워 그 심오한 이치를 깨닫게 되자 장기야말로 과연 무인들의 기개를 높이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한다.
이 밖에도 장기를 즐겨 고수로 불리던 사람은 많다. 태종 때의 재상 민제 , 남재, 세조 때의 문인이 석형과 김예몽, 선조 때의 명신 오성 이 항복, 유 희춘), 방랑 시인 김삿갓 등은 당대의 장기 고수로 통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대부분 야사나 구전등으로 전해져 내려올 뿐, 정사에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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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장기에 담겨 있는 음양오행의 원리
장기(將棋)는 기물에 일정한 기능을 부여하여 총32쪽의 기물로 전쟁놀이를 하는 게임이다. 이런 놀이를 창안한 연혁에 대하여 고증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으나 우리의 선조때인 한대(漢代) 이후에 개발, 발전된 것이라고 볼 때 장기 판(板)과 기물의 숫자가 막연히 생긴 것은 아니라고 본다.
漢,楚는 각각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를 표방함이요. 漢,楚의 색(色)이 적(赤),청(靑)인것은 적은 양(陽)이요, 청은 음(陰)을 표방하기 떄문이다. 또한, 차, 포, 마, 상은 옛날 군대의 기능과 형태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음양에서 사상(四象)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물의 모양이 팔각으로 된 것도 사상에서 팔괘로 발전하니 단순한 모양으로 볼 것이 아니다.
곧 사각의 각(角)을 자르면 팔각이 되고 또 한손에 쥐고 움직일 때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것이다.장기판의 가로9선과 세로 10선에서 9는 양,10은 음을 뜻한다. 9는 수(數)로서 극(極)이요,
10은 0 이니 생산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곧, 9는 양으로 태양을 상징함이요 10은 음으로 땅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상의 모든 물건을 생성하는 바탕인 것이다.장기가 전쟁놀이인 만큼 고대전쟁에서는 왕의 항복을 받는 편이 승리하는 것으로 군(君)이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 두어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하였다.
왕을 가운데 두고 그안에 있는 양사는 근위병이요, 제일 앞의 병은 진영의 보초로 국가의 국방조직을 완전히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전쟁터에서 왕이 머무는 곳은 중군(中軍)이니 장기판의 가운데(5선)이고 그 가운데 선을 기준하여 양편으로 동일진영을 이루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다.
기물을 차릴때 군(君)이 있는 아래 상,중,하 3선은 천지인(天,地,人)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선은 천(天)이니 군이 위로 올라가면 천군이라 하여 패한다고 하지 않는가.장기판과 기물을 보면 역(易)의 섭리를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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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장기의 유래
장기가 만들어진 유래는 대략 3가지로 알려져 있다.
- (1) 당시의 불교도(佛敎徒), 즉 승려들이 전쟁이나 살생을 금기(禁忌)로 하는 그들의 계율 때문에 인간 본연의 파괴 본능을 달래고,수도(修道)를 하는 시간외에 잠시라도 세속에 흐르기 쉬운 잡념을 떨어 버리기 위해 전쟁을 모의(模擬)로 한 소재(素材)로 장기가 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 (2) 인도의 한 왕이 현인에게 아주 재미잇는 게임을 만들어 다음과 같은 특성을 사리라고 명했다.
- ① 깊이 생각할수 있게 하고
- ②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하며
- ③ 선견과 지혜를 필요로 하며
- ④ 찬스를 포착하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우며
- ⑤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3) 버마의 한 왕비가 전쟁을 좋아해서 전쟁터에만 나가있는 왕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가상 전쟁놀인인 장기를 고안하여 왕과 함께 장기를 즐기게 되어 전쟁을 중지시키고 사랑을 되찾았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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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한국 장기의 역사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 초기인 한사군(漢四郡) 시대에 수 많은 한인(漢人)들이 이주해 오면서 장기를 퍼뜨린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 초한전을 가상하여 우리 체질에 맞는 장기로 연구하고 개량하여 지금 우리가 두고 있는 한국장기로 발전시켰다.우리나라의 장기에 관한 문헌으로는 고사서(古史書)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장기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과 승 도림(道琳)이 바둑을 둔 얘기를 쓴 가운데 개로 왕이 장기를 즐겼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세종의 중신 김석정(金石亭)과 김예몽(金禮蒙)이 상희대국(象戱對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추측하건대, 장기가 전래된 후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양반계급이나 고관들만이 즐기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장기의 명칭이 개정되기 전에는 혁기(奕棋) ·상기(象棋) ·상희(象戱) 등으로 명칭도 다양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 등에 상희(象戱)라는 이름 아래 장기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었고 1560년 중종대(中宗代)의 문신 삼도예찰사인 심수경(沈守慶)의 <유한잡록(遺閑雜錄>을 보면 비로서 "장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象棋 用車包 馬象士卒 以木磨造 而刻字진彩...皆是消日之戱也"란 기록이 있다.
또 장유(張惟)는 상희지(象戱志)에서 장기의 정의와 장기판의 길, 기물의 역할(기능),기물의 위치 기물의 행마, 승부와 빅 등 장기 이론에 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장기의명수(名手)로는《식소록(識小錄)》에 전하는 금강산 백전암(白田庵)의 지암대사(智巖大師)가 있고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소개된 종실 서천령(西川令)이 특히 유명하여 서천령 수법이라는 장기의 묘법을 납겼다고 한다.
이상이 대략적인 우리 장기가 지나온 역사인데, 더 이상 정확하게 근원을 삼을만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우며 오늘날 장기인들에게는 잊혀진 한국장기의 역사를 복원,재조명하려는 사명감과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족문화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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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중국 장기의 역사
중국에서는 원래 장기를 "상희(象戱)" 라고 하였는데 장기가 지금의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육조(六朝) 시대 이후 인 것으로 추측한다.
육조시대 이전의 것은 중국 학자 유신의 상희(象戱)에 나타난 문헌으로 미루어 지금의 장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고, 그 이후 당(唐)의 증증유(中憎儒)의《현경록(玄經錄)》에 나타난 것을 보면, 상희에는 금상(金象). 사장(士將). 천마(天馬). 보졸(步卒)등이 있고 그 행마법(行馬法)도 지금과 비슷하며, 송대(宋代) 유쥰촌(劉俊村)의 상혁시(象奕詩)에는 포(包), 상(象), 마(馬), 차(車), 사(士), 졸(卒)등 지금과 같은 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가장 흡사함을 알 수 있어, 장기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송대 이전일 것이라 추측한다.
또《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기원전 1천8백년경 하(夏)의 폭군 걸왕(桀王)의 신하였던 오증(烏曾)이 장기와 바둑을 만들었다고전하며,《유원총보(類苑叢寶)》에는 진대(晋代) 사람인 도간(陶侃)의 고사가 적혀 있는데 은(殷)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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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대한장기협회의 역사
한국장기협회는 지금으로부터 47년전인 1956년도에 서울의 윤응식씨가 주축이 되어 조선팔도 고수들(8명)이 모여 한국기도원(韓國棋道阮)이란 이름의 장기협회를 임의단체로 발족하고 이듬해 서울신문사에서 국수전 및 프로입단대회를 최초로 개최한 것이 효시가 된다.
한국의 장기초대국수에는 부산고수 안성흥(安盛興) 당시 4단이 예상을 뒤엎고 임재민 5단을 누르고 초대국수가 되었다.장기협회는 10년뒤인 1967년에 한국장기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73년에 다시 한국장기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20년 가까이 임의단체로 명맥만 겨우 유지해오다가 1986년 6월 23일 한국장기협회가 정부로부터 공인단체(사단법인)로 인정받아 초대 이사장에 유규상(현 9단)씨가 취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제 2대 이사장에 이일훈 9단(작고)이 취임하여 8년 동안 단체를 이끌어 오다가 1993년 8월 문화체육부로부터 허가취소 당하여 법인체가 해산되어 다시 임의단체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협회는 약5년간 양분화 체제로 유지되었다. 1994년 김응술9단이 주축이 되어 대한장기협회를 창설 문화체육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허가받아 출발하였으며 1개월 뒤 민속장기협회가 뒤이어 법인체 허가를 받음으로서, 장기협회는 2개의 단체로 양존되었다.
이후 5년만인 1999년 5월, 문화관광부의 권유와 양단체 대표(김응술, 최사정)의 극적인 합의하에 두 단체를 합친 새로운 유일단체인 (사)한국장기협회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초대회장에는 민속장기협회 이사장 이였던 최사정씨가 취임하였고 2002년5월 김응술9단이 2대회장에 선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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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한국장기의 특징
장기는 약 4천년전 고대 인도에서 만들어진 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삼국시대 초기)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파된 중국장기를 우리 선인들은 한민족의 성향과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여 발전, 변형시켜 조선시대에 이르러 오늘날 널리 사랑받는 한국장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중국장기와의 차이점을 몇 가지 서술하면 중국장기인 상기(象棋)는 장기판 가운데에 초하한계(楚河漢界)라는 큰강이 있어 중국의 지리적 환경을 반영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큰 강이 없고 산들이 많아 그 중간 경계인 강을 없앴고 기물의 움직이는 방법인 행마법도 상당 부분 다르게 창안하고 수정하여 행마적인 면에서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각 나라 장기 중 한국장기와 가장 유사한 것이 중국장기로 우리장기를 잘 두시는 분들도 어렵지 않게 중국장기를 배워 대국을 할 수 있다(참고로 "졸(병)"이라는 기물을 대표적인 예로 들면 우리장기는 졸이 어디서나 옆이나 앞으로 이동할 수 있으나 중국장기는 가운데 강을 넘기 전까지는 오직 전진만 할 뿐 옆으로 갈 수 없으며 강을 넘은 다음에만 좌우로 또는 앞으로 움직일 수가 있다.
물론 졸이 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필히 공통이다.
지금 여러 기물중 졸만 예를 들었으나 "포"라는 기물과 궁성에서의 행마법은 아주 낯설어 한국인이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 중 한가지이다. 일단 이 정도로 행마의 차이점을 간략히 소개한다.)한국장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 1. 장기알이 팔각형으로 되어 있다.
- 선조들은 동양 8괘 사상에 의해 장기알을 원형에서 팔각형으로 변형시켰다. 중국 장기알은 원형이고 일본장기인 "쇼기"는 오각형이다.
- 2. "빅장"이라는 독특한 대국규칙이 존재한다.
- 빅장은 본래 장기가 불리한 자가 왕과 왕끼리 마주 보면서 비기자고 청하는 규칙인데 옛부터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아 온 약소국 한민족으로써는 침입을 막아내고 서로 화평을 취하여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민족사상이 반영되어 빅장 제도가 생겨났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이 빅장 규칙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승부의 갈림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는 원인을 제공하여 많은 비판과 규칙 개선의 목소리가 높은 것 또한 간과할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대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빅장까지 고려하면서 수를 더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에 완승을 거두기가 그만큼 어려워 진다. 반면에 중국장기는 빅장이 없고 오히려 왕과 왕끼리 마주보면 지게 되는 "왕장 제도"가 있어 보다 냉엄한 승부가 갈리고 비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 3. 장기판 차릴 때 마와 상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 판차림에는 상(象)이 어디에 배치되는가에 따라 ①왼상 차림 ②오른상 차림 ③안상차림 ④바깥상 차림의 4가지 유형이 있어 대국자가 선호하는 차림으로 다양하게 대국을 전개해 나갈수 있다. 이 특징이야말로 한국장기의 묘한 매력과 무궁무진한
변화수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전략의 다양성을 배울수가 있다. 4가지 차림으로 출발하여 보통 귀마포진. 원앙마포진. 면상포진. 양귀마포진. 양귀상포진이라는 5가지의 다양한 전략.전술이 이루어지게 된다.
서양장기인 체스를 비롯하여 중국장기와 일본장기는 처음 차림의 유형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한국장기와 비교된다. - 4. "한수 쉼"이라는 독특한 규칙이 존재한다.
- 자기가 둘 차례에 마당히 둘것이 없을 경우에는 한수 쉬어 상대에게 다음수를 넘길수 있는 규칙인데 장기를 두다보면 보통 종반전에 그런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장기가 불리한 자에게는 매력적인(?) 규칙이 될 수 있겠으나 승패의 갈림이 적을수 있고 불리한 자에게 지나친 수단이 될수도 있는 등 여러 장단점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규칙이라 할 수 있다.
한국장기를 제외한 다른나라 장기는 한수 쉼이 없어 어떠한 경우에도 꼭 응수를 하여 한수 두어야 한다. 이는 보다 냉엄하고 현실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어 현대 사고감각에 부합되는 환영받는 규칙으로 그런 점이 한국장기와 두드러지게 비교되고 있다. - 5. 장기알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 32개의 장기 기물중에서 궁(宮)이 가장 크기가 크고 그 다음에 대기물인 차.포.마.상이 중간 크기이고 소기물인 졸과 병(사 포함)이 크기가 가장 작다. 우리 민족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과 민족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국가가 어려운 위기에 처할 때 단결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역사적 흐름에 비추어 나라의 왕을 내세워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뜻에서 궁의 크기가 가장 크다. 반면 중국장기나 일본장기는 기물의 크기가 모두 똑같아 한국장기와 대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다소 이색적이다.
- 6. 왕은 절대 궁성밖으로 나갈 수 없다.
- 왕은 궁성안에서만 움직일 뿐 절대 궁성밖으로 나갈수 없는 규칙으로 인해 활동범위의 제약을 많이 받고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궁성앞을 두텁게 보강시키는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서양 장기인 체스는 한국장기와 달리 왕과 여왕이 어느 자리든지 갈수가 있기 때문에 활동 범위가 훨씬 넓어 좀더 고려되고 생각할 수들이 많은 것이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 7. Janggi is the expression of the dynamic moves.
- 한국장기는 기물들의 상호 역동적이고 기동성을 함축한 동적인 표현의 장이다.
한국의 민족성과 우수한 인적자원을 활용한 전략으로 충효사상.희생정신을 함양시키고 한국인의 뿌리깊은 역사가 깃들여 있는 전통 문화의 중심체이다.
- 김경중 九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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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우리장기에 자부심을 갖자
우리나라에 전달되는 놀이는 크게 3가지입니다. 장기와 윷놀이와 바둑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하였지요.
부자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3대를 넘지 못하고 나라의 집안이 아무리 훌륭해도 7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한민족의 지혜를 영원히 전달하기 위하여 놀이라는 도구속에 민족의 지혜를 저장해 두었지요. 마치 된장이나 고추장을 통하여 민족의 건강을 지켜 주었듯이 말입니다.현재 장기는 중국장기와 일본장기와 한국장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서양에도 다양한 종류의 체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체스의 규칙이나 체스판 체스기물 등이 피나는 노력에 의하여 통일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후 체스는 바둑 이상가는 지혜의 놀이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체스도 동양의 장기에서 응용되었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장기는 중국에서 유래 된 것이 아니라 장기의 종주국은 한국입니다.현재 궁이 초와 한으로 바뀐 것은 크게는 고구려의 멸망이후 중국의 동화정책과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가는 동안에 중국화 된 것입니다.
일본의 문화의 뿌리는 어디 입니까. 중국 문화의 상당한 부분도 2000-3000년 전에는 동이족의 문화에서 파생 된 것 입니다.현재 일본장기는 중국이나 한국장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만은 자기것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훌륭하게 장기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궁을 왕(王)이나 옥(玉)으로 하고있으며 기물이 5각형입니다. 중국장기는 한국 장기를 모방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장기와 한국장기는 장기판과 기물이 많이 다릅니다. 특히 궁은 초(礎)와 한(漢)이 아닙니다. 그들은 장(奬)과 수(帥)를 사용합니다. 포나 상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기물과 다릅니다. 장기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면 변형이 되기가 어렵겠지요. 중국장기의 기물보다 한국장기가 궁을 제외한 어떠한 기물 보다 가장 장기의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현재의 초(礎)와 한(漢)은 옥쇄를 상징하는 용(龍)이나 거북구(龜)로 바꾸거나 민족의 기상을 살리기 위하여 고구려 고(高)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장기판에는 중간에 칸이 없습니다. 강(江)을 뜻하는 경계를 만들어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장기판에는 무궁한 수리학적 비밀과 설계가 들어있어 몇 천년동안 변형되지않고 유지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제일 완벽 합니다. 장기판에는 24절기, 12개월, 28개의 동양 별자리, 8괘, 64괘, 천부경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기판 역시 천지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설명하는 장기는 한국 장기뿐입니다.
우리는 1000만명 이상이 장기를 즐기고 있지만 조직화와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다 우리의 장기 문화를 사랑하고 체계화한다면 태권도나 바둑 이상으로 세계화시키며 세계인과 교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장기는 고구려 멸망 이후 1600년만에 한국의 놀이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관 성원, 그리고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 문학박사 창원대학교 신석환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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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기의 노래
장기에 관하여 고증할 수 있는 사학 자료는 부족하지만 각 지방에는 장기를 노래한 민요들이 지금껏 전해지고 있고 문인들, 시인들도 장기에 관한 시들을 지어냈다. 현재 전해지는 장기 민요, 시 등에는 "예성강곡" 제주, 아산, 영일 지방 등지의 "장기 민요", 김삿갓의 "장기시", 야화집에 전해지는 광해군 때의 명기 "소백 주의 시조" 등 다수이다.
예성강곡은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전해지는 두 편의 노래로 장기에 얽힌 설화 형식의 고려 가요이다. 당시 예성강 하구의 벽란정에는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송나라 상인들도 많이 모여 국제적인 상거래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 장기를 잘 두는 중국 상인 하두강이 장사차 왔다가 아름다운 고려 여인 에게 반해 주막 주인 인 그녀의 남편에게 접근하여 내기 장기를 두게 된다. 하는 그에게 계속 비단을 잃어 주면서 그를 안심시키기에 이르른다. 주인 남자가 한참 흥이 올랐을 무렵, 하는 주인 남자에 게 비단을 몽땅 걸겠으니 부인을 걸지 않겠느냐는 엄청난 제 안을 하게 되고 자신 만만한 주인 남자는 선뜻 응하게 된다 하는 마지막 판에서 본래의 기력을 발휘하여 모든 것을 빼앗 는다 하는 유유히 부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그제서야 주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전국을 유랑 걸식하게 된다.이상이 예성강곡 전편의 내용이다. 후편은 끝까지 정절을 지켜 하두강의 손에서 벗어난 여인이 울면서 남편을 찾아헤매 는 내용이라고 한다. 고려 전성 시대의 장기는 이 같은 내용을 비추어 그 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나 안타깝게도 예성강곡은 구전되어 올 뿐이다.
한편 방랑 시인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7운 8행의 장기를 노래한 한시를 지었는데 그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힌다."시 벗이며 술 벗들이 뜻이 맞아서
장기판을 방 가운데 높이 벌렸도다.날랜 포가 건너는 곳에 위력이 있고,
사나운 상이 웅크린 앞엔 진세가 웅장하다.쏜살같이 달리는 차는 먼저 졸을 먹어치우고
함부로 날뛰는 마는 매양 궁을 엿보는구나.남은 병이 흩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니,
겨우 남은 양사로는 감당 못해 한판이 끝나더라"전국을 방랑했던 김삿갓이 이러한 시를 남긴 것을 보면 그 당시 장기의 보급 정도가 가히 대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투랑가는 각기 그나라의 풍속이나 민족성에 따라 각각 특이한 기물과 대국방식이 생겼다고 보는데 서양에서는 체스로 통일되어 있으나,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특성이 다른 장기가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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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묘수와 훈수
시골 장터나 길모퉁이 등에서 옛부터 심심치않게 보아왔던 풍경이 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바로 묘수풀이 문제를 놓고 상행위를 하는 모습이다. 언뜻 보면 어린 아이라도 서너 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문제여서 너나 할 것 없이 선선히 거금을 걸고 응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유단자급 전문 기사들이 라야 풀 수 있는 20수 전후의 복잡한 문제이다. 옆에서 훈수를 하는 바람잡이들도 한패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호인들은 이들의 상행위를 근절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훈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예전에 TV에 장기 훈수를 하다가 말다툼을 하고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와 실소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공식적인 대국이 아닌 다음에야 장기판 옆에는 구경꾼들이 꼭 붙게 마련이다. 이들이 점잖게 구경만 하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한국 사람들이 참견 좋아하는 민족이라면 굳이 그 이유도 되겠지만 장기판 옆의 훈수꾼들은 직접 두는 사람보다 더욱 재미를 가지고 보게 되므로 자신이 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또 이들은 항시 약자편을 드는 일이 많아 다 이겨 놓은 장기를 망쳤다고 화를 내고 싸우기까지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기야 군자도 훈수는 참지 못한다고 했으니, 옛 만담에 도둑질하러 들어간 도둑이 문틈으로 벌어지는 장기 판에 넋을 잃고 훔쳐보다가 훈수하던 버릇이 나와 그만 "저 차, 저 차!"하다 잡혔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또 이런 대화도 오간다.
"자네, 아들을 잘 두었다는데 어느 정도인가?"
"뭘, 장기판에서 훈수 안 할 정도는 가르쳐 놓았네."예의를 꼭 지켜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훈수하는 모습은 꼭 나빠보이지만은 않는다. 장기를 두는 사람은 두는 사람대로, 구경꾼들은 구경꾼들대로, 훈수하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각 기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꼭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할 이유까진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유구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잘 보존해온 장기,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기에 훈수하은 사람들조차 밉지 않았던 장기는 마치 공기처럼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은 우리만의 숨결이 아니겠는가?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바닷가 만을 그릴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대는 초저녁, 널찍한 평상 위에 속옷차림으로 앉아서 얼음을 띄운 수박 화채 한 그릇 마시며 장기판을 앞에 놓고 신선 놀음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려지는 슬기로운 피서법이 아닐까? 장기를 두면서 더위를 잊어보는 것은 꽤나 지혜로운 휴가를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장기는 우리 민족 사랑방의 역사이며 우리 놀이문화의 역사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장기는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자리에서 변해가는 그 모든 것들을 질시하듯 지켜보았다. 아버지께서도 두셨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께서도 두셨던 장기, 지금은 우리가 두고 있다 각종 문명의 발달로 이루어진 이름 모를 서양의 스포츠들이나 오락을 멋 모르고 주는대로 수용하여 희희낙낙하고 있는 동안 우리 전통 문화는 서서히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의 것을 아끼고 찾자는 의미에서도 우리의 전통 문화는 지켜지고 가꾸어져야 한다.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고 경시해선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장기는 남한에서만 1천만을 훨씬 넘는 동호인들을 보유하고 있는, 가히 대중적인 오락이다.
우리 인구의 4분의 1 이 장기를 둘 줄 안다는 것이니 이는 보급률에 있어서도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우리의 놀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길 때는 즐기면서도 천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야속하기 그지없다. 가장 대중적인 놀이이니만큼 가장 아끼고 사랑받는 우리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협회는 물론이거니와 228명의 사단법인 한국장기협회 전문 기사들의 장기를 아끼는 마음이 곧 1천만 동호인들에게도 꼭같은 마음이 되어 우리의 장기를 계속 보급하고 활성화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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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수불퇴
조선조 영조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남루한 의관으로 전라도 무주고을에 당도했다.
어느집 대문앞에 앉아 잠시 피로를 풀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대문안 사랑방의 열려진 문사이에 장기판이 보이고 그옆에 한눈에도 비범하게 보이는 소년이 혼자 앉아 있었다.무료하기도 하고 소년의 준수한 용모에 호기심과 호감이 가기도하여 "너 장기 둘줄 아니"하고 물으니 소년은 인사를 한뒤 "잘두지는 못하나 장기 가는 길은 알고 있읍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하고 장기 한판둘래" "예, 그렇게 하시지요"소년이 선뜻 응하고는 말을 이었다.
"장부가 글을 지을때는 시령이 있고 술을 마실때는 주령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기도 내기로 두어야 실력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 뵈옵는 어른에게 내기를 두자고 할 수는 없으니 그냥 한판두어봅시다"이리하여 대국이 시작되었는 데 소년은 처음부터 빈틈없는 방어와 급소를 찌르는 날카로운 공세를 펴 평소 장기에 자신을 가졌던 박어사도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세가 불리하게 된 박어사는 그만 귀중한 마(馬)를 잃었다. 큰 실수를 한 것이다.박어사가 소년에게 한수만 무르자고 하자 소년은 "대장부가 두는 장기인데 안됩니다"하고 거절했다. 박어사가 다시 사정해 보았으나 소년은 "장기는 전쟁입니다. 죽은 송장이 다시 일어나 싸우는 것을 보셨읍니까"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소년은 완강했다. 그래도 박어사는 소년의 마음을 더알고 싶어 한수무르자고 세 번째 요청하니 소년이 대답하기를 "아저씨 도량을 보니 명어사는 될지언정 정승은 못되시겠읍니다"
고 하는 것이 아닌가.박어사는 "그래 그러면 너는 장차 뭐할래"하고 물었다.
"저는 정승을 하지요"
결국 박어사는 그판을 지고 말았다. 속으로 "역시 큰인물이 될 아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래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예 김일동이라고 합니다"
명어사 박문수는 이날 어린 소년에게서 큰 교훈을 배웠다.
박어사는 소년 일동에게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라며 친구인 서왕수진사에게 서찰을 써주고 떠났다.
소년은 박문수어사가 준 서찰을 간직하고 있다가 부친에게 고하고 서울로 떠났다.그후 서진사에게서 1년을 배우다 박어사를 찾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 나중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소년의 말대로 어사 박문수는 정승은 해보지는 못하고 말았다.
한수 무르는 것보다 차라리 떳떳하게 지는 것이 더 남아다운 일임을 어린 소년 김일동은 가르쳐준 셈이다. -
13. 총각머슴 출세기
조선조 숙종 때 밀양에 '고유'라는 머슴살이 청년이 있었다. 고유가 23살 되던 어느 날 동네 노인들과 박 좌수가 대청에서 내기장기를 두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장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박 좌수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내기장기를 청했다.
"제가 지면 3년 동안 새경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이기면 따님을 주시지요."
박 좌수는 내기장기라면 자신이 있는 데다 머슴이 당돌하고 괘씸하여 혼이나 내줄 생각으로 응했다. 평소 박 좌수의 딸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고유는 박 좌수가 내기장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틈틈히 장기실력을 연마해온 터였다. 막판에 세가 불리해짐을 느낀 박 좌수, 장기판을 냅다 쓸어버리고 노발대발했다.
"3년 품삯을 그냥 주면 주었지 머슴을 사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박 좌수의 딸이 마침 이 광경을 보았다. 평소 고유의 성실함에 호감을 가진 데다 특히 이날의 담대함에 더욱 마음이 끌려 아버지를 설득했다. "손아래 사람에게 실언이 웬 말입니까?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일구이언하는 아버지의 딸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한편 고유는 내기장기로 박 좌수의 사위가 됐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다. 박 좌수는 평소 부지런한 고유를 좋아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머슴 편을 들어 자신을 욕하게 되자 마침내 창피를 무릅쓰고 혼례를 치러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위가 미워서 재산은 한푼도 떼어주지 않았다.
새색시는 푼푼이 모은 돈 50냥을 주면서 10년을 기약하고 공부하여 장원급제한 후 돌아오도록 남편을 설득했다. 고유는 아내 곁을 떠나 충청도 청주의 보은사에서 7년,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서 3년간 뼈를 깍는 노력 끝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다. 숙종대왕은 고유에게 가주서(승정원 정7품 벼슬)란 벼슬을 주었다.
숙종은 장기를 잘 두는 고유를 총애했는데 얼마 뒤 고유의 머슴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밀양부사로 임명했다. 금의환향한 고유는 먼저 처가를 찾았지만 이미 장인은 죽고 집은 폐허가 돼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부인은 억척스레 일해 천석꾼이 됐으며 12살 된 아들도 있음을 알았다. 고 부사는 가족을 거두고 선정을 베풀어 길이길이 칭송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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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뺨 때리고 벼슬 얻고
장기를 서민들이 가장 즐겨두던 때는 조선시대이다. 우암송시열에게도 장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친척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갔던 영의정 송시열이 평복 차림을 한채 민심을 살피며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잠시 비를 피하고자 주막에 들었다. 얼마 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관복을 입은 웬 젊은이가 들어와 주막 주인에게 방을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주인이 빈방이 없다고 해도 관원은 막무가내였다. 주인은 하는수없이 그를 송대감이 묵고 있는 방으로 데려와 동숙을 청했다. 송대감이 자리를 비켜주자 젊은이는 인사도 없이 털썩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관원은 무료했든지 "첨지, 우리 장기 한 판 둠세"하며 말을 건네왔다. 장기라면 송대감은 국수급... 이 젊은이가 상대가 되겠는가. 첫판을 보기 좋게 지고 난 젊은이가 다시 한 번 두자고 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젊은 관원은 그제서야 노인을 얕잡아 본것이 미안했는지 인사를 건넸다. 첨지가 영감으로 격상됐다.
"영감, 우리 서로 수인사나 합시다."
"예, 저는 성은 송나라 송(宋)가요, 이름은 때 시(時)자, 매울 열(烈)자를 쓰는 송시열이요."
젊은이는 ´아뿔사´ 죽었구나 싶었다. 관복은 입고 싶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엽관운동을 하였던가. 이제 겨우 조그마한 벼슬자리 하나 얻어 부임지로 가는 길인데 이젠 끝장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다가 젊은이는 냅다 송대감의 뺨을 때리며 큰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놈의 첨지! 어디서 감히 영의정 대감의 함자를 함부로 도용하느냐."
젊은이는 "고얀지고"를 연발하면서 장대비 속으로 말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호되게 얻어맞은 우암대감은 빙그레 웃으며 뺨을 만지고는 달아나는 패기만만한 젊은이의 모습에 속으로 ´큰 인물이 될 놈이로다´하고 생각했다.
주막 주인을 불러 물어보니 이웃 고을에 사는 아무개 아들인데 엽관운동으로 벼슬을 얻고 오늘 부임지로 가는 길이라 일러주었다.송대감은 젊은이의 큰 배짱과 임기응변의 뛰어남을 감탄하면서 한양으로 올라간 즉시 임금에게 청하여 그를 평양부사로 승진시켰다. 장기 한 수 배우고 뺨까지 때려주고 벼슬을 얻게 된 젊은이도 보통인물이 아니었지만 송시열 대감의 사람 볼 줄 아는 뛰어남도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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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동탁장기의 유래
동탁장기란 한마디로 장기를 두다가 잘못두어 기물이 죽거나 지면 너무 억울해서 상대방에게 한번 물려달라고 생떼를 써 빅장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장기를 두다 보면 억울하게 한수차로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외통수를 당한 쪽에서 자기도 한수면 외통수로 이길 수 있을 때 이것을 상대방이 인정하여 빅장기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동탁장기라고 한다.
동탁장기란 한마디로 장기를 두다가 잘못두어 기물이 죽거나 지면 너무 억울해서 상대방에게 한번 물려달라고 생떼를 써 빅장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장기를 두다 보면 억울하게 한수차로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외통수를 당한 쪽에서 자기도 한수면 외통수로 이길 수 있을 때 이것을 상대방이 인정하여 빅장기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동탁장기라고 한다.
서로 외통수가 한수 사이로 이루어지고 있을때 이 빅장기의 이름을 '동탁'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생떼를 쓰는 장기´라 할 수 있다.
장기는 예나 지금이나 지면 물리고 한수 다시 해보자고 사정해보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요즘도 자주 물리는 상대에게 "동탁장긴줄알아? 물리는 장기는 40년이 지났어. 이 사람아"하며 농담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어떤이는 장기에 지게 되면 꼭 물리는 버릇이 있어 어느날은 상대가 아예 따먹은 장기짝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려 다시 물리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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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산모 구한 장기알
옛날 한양에 딸만 일곱을 둔 부자가 있었다.
부인은 늘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 8번째 태기가 있어 아기를 분만하려는데 웬일인지 온갖 고통을 다 겪고도 아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좋다는 약은 다 사와서 먹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산모가 생명을 잃을 우려가 있어 온 집안이 정신이 없었다.
옆방에서 아기 울음소리만 고대하던 남편은 대문을 박차고 나가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남산골에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의원은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나가 봉지에 싼 물건을 들고 와서 이것을 물에 푹 삶아 그 물을 산모에게 먹이면 아기가 금방 나올 것이라고 했다.
급한 마음에 봉지를 받아 쥐고 나선 남편은 허겁지겁 집으로 와서 약탕에 물을 끓이라 이르고 봉지를 펴보니 장기알이 아닌가? 그것도 머슴들의 손때 묻은 졸만 40개였다. 차,포,마,상은 없고 오직 졸뿐이었다.남편은 괘씸했지만 워낙 급한 처지라 할 수없이 장기알 삶은 물을 산모에게 먹이니 얼마있지 않아 아기가 쑥 빠져 나왔는데 그 아기는 그렇게도 고대하던 사내아이가 아니었던가..
며칠 후 푸짐한 선물을 싸들고 가 의원에게 그 까닭을 물은 즉 의원 왈
"허허, 이 양반 그 쉽고도 쉬운 이치를 모르겠소?졸은 전진만 하지 않소? 더구나 졸 40개가 계속 전진해보시오 무쇠라도 뚫고 나가지 않겠소" 하드란다.이렇게 장기알 힘으로 태어난 사내아이는 온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아기가 병이 들었다.
고추가 부르트고 진물이 나서 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8도의 용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 치료를 해보았으나 소용없고 고추는 날로 흉하게만 되어가서 온 집안은 초상난 집과 다른 바 없었다.남편은 선듯 옛날 장기알을 주었던 의원이 생각나서 불렀더니 의원, 또 해괴한 소리를 하지않는가?
오랜된´장기알´을 구하여 펄펄 끓여서 그 물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마님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답답한 처지라 할 수 없이 머슴들을 시켜서 머슴방에 있던 장기알을 가져와 끓여 먹이니 그렇게도 흉하던 고추가 말끔하게 낫는 것이었다.하도 신기하여 의원에게 후한 사례를 한 후 까닭을 물으니 의원 왈
"엄격한 법도 밑에서 갇혀 지내던 7명의 규수들이 막내 동생의 출생이 기쁘고 귀엽고 또 생전에 처음보는 남아를 대하는지라 신기해서 만져주어 생긴 병이요, 이는 한창 강한 여인의 음기가 양을 범한 것이니 젊은 머슴의 손때와 기름이 진 장기알이 가장 좋은 약이 되지요"하드란다음은 양으로 다스린다는 이론은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음양2원론적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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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장기와 삼국지 (1)
장기에는 초,한을 비롯하여 차,포,마,상,사,졸(병)이라 불리는 기물이 있다.
장기기물에 관하여 써놓은 이 전에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초와 한은 항우와 유방을 나타낸다. 삼국지와 조금 거리는 있지만, 삼국시대의 위,촉,오를 나타내기엔 두편으로 나누어져있기에 우리나라 장기에 글을 새기는 사람들이 고민하다 초,한으로 했으리라 생각한다.
전차부대를 뜻하는 차는 삼국지에서 조조의 손꼽히는 부하 장수 5명을 5관문을 지나면서 당당하게 죽이고 나서는 관운장을 뜻한다. 그 무시무시한 용맹과 유비를 보필하는 지력으로 질풍처럼 적토마를 몰아 적진을 질주하는 모습이 가히 한번지나가면 그곳엔 남는게 없다. 같은 편에게는 인자와 보*** 상대편에게는 공격하러 감히 뛰어들만한 용기조차 없애버릴만큼 무서움을 나타내는 차를 보고 세상사람들은 적토마를 타고 질주하는 관운장과 비교한다.
포병부대를 뜻하는 포는 삼국지에서 무식할만큼이나 그 누구와도 견주어도 힘과 무력에서 뛰어났던, 여포를 뜻한다. 유비, 관우, 장비를 혼자서 상대했을만큼 그 무시무시한 무력은 그 누구도 삼국지에서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은 무력만 가지고 하지는 못하는 법, 배신을 밥먹듯이 하고, 지혜라곤 거의 없는 여포는 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 없다. 장기판에서도 단지 포두개로는 외통도 할 수 없는것을 보면, 정말 무식한 여포와 똑같다 할 수 있다. 뛰어난 모사였던 진궁과 함께 있을땐 그 누구도 감히 성을 함락하지 못했던 삼국지를 보면 사와 비교되는 모사와 포에 비교되는 여포는 장기판위에서도 땔래야 땔수없는 관계이다.
포가 지키고 있는 궁궐은 그누구도 쉽게 뚫고 오지 못한다. 하지만, 사가 없는 궁궐의 포는 거의 무용지물인것을 보면 정말 여포가 틀림 없는것 같다.
기병부대를 뜻하는 마는 삼국지에서 오호대장군에 속해있던 마초를 뜻한다. 서량땅의 험준한 지세에서 용맹을 떨치던 마초는 장기판위에서 조금의 틈만 보여도 뛰어들어 상대의 귀중한 기물과 궁을 위협하는 마의역활이라 할수 있겠다.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나 공명의 작전지시에 한번도 실패한적이 없었던 그는 뛰어난 용맹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 장기판에서도 홀로 무리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지 않고 반드시 큰 것을 노리고 작은 것을 쟁취하는 작전으로 상대의 혼란을 만들어내는 기물인것이다. 대국초반일때에는 작게는 포를 노리고 졸을 치며, 중반이후에는 크게 왕을 노리며 차를 취하는 무서움을 갖고 있다.
상대의 궁궐 앞에 딱버티고 있으면 상대는 우왕좌왕 어쩔줄 몰라 혼란하게 되며 왕조차도 갈 길을 찾지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있게 되는 것이다.
코끼리부대를 뜻하는 상은 삼국지에서 큰 용맹과 큰 충성심을 자랑하는 상산의 조자룡을 뜻한다. 유비의 아두를 지키기 위해 적진에 홀로 뛰어들만큼 용맹스럼과 희생정신은 장기판에서 졸하나를 취하고 죽더라도 용감하게 뛰어드는 상과 같다. 한쪽에서 조용히 숨어 있다가 비호처럼 갑자기 덤벼들어 상대의 중요한 기물들을 타격한다. 한쪽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적의 급소를 공격하여 치명타를 날리는 기습작전의 최고 선봉인 조운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 어느때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수 있다. 나이가 늙어서도 전장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장군중에 대장군이다. 상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상황에도 뛰어들어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를 믿어주는 군주를 위해,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친다.
모사를 뜻하는 사는 앞에서 말했듯이 지략과 책략으로 왕을 보필하는 모사 진궁을 뜻한다. 여포의 옆에서 뛰어난 작전 구사로 그의 순간 순간마다의 뛰어난 재치는 상대로 하여금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 그 어떤 기물 앞에서도 무예를 몰라 공격은 하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지고 있는 단 한수의 기술로 왕을 지키는 사와 같은것이다. 차,포,마,상등 어떤 기물이 와도 주변의 모든 형태를 이용하여 훌륭히 막아낼수 있다. 하지만, 사는 어찌나 연약한지 무예를 모르는 모사 진궁처럼 다른 장군을 도울수는 있지만 홀로 큰뜻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이다. 삼국지에서도 진궁은 여포를 떠나게 되자 아무런 힘없이 사라져버린다. 자신을 믿어주는 기물이 없이는 힘이 없는 외로운 사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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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장기와 삼국지 (2)
삼국지 장수를 장기판에 포진한다면 초(유비). 한(조조)라고 봤을 때,
각각의 기물의 성격에 맞게 장수를 배치한다면 어떻게 편성하는 것이 좋을까?초(촉나라)
졸 : 요화/관평/왕평/오반/장익
편성한 이유
이들은 특A급의 능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촉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장급 인물들이기에 졸에 적합하다고 판단.포 : 조운/진도
편성한 이유
조운은 선봉장이기 보다는 항상 유비를 호위하는 무장이죠. 즉 유비나 제갈량을 호위하면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내기도 하는 수족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진도의 경우는 명성과 공적이 항상 조운에 버금가는 명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임무나 이미지가 조운과 비슷하리라 봅니다. 장기에서도 포는 주로 본진에 주둔하면서 적진과 본진을 넘나들며 수비와 공격의 임무를 맡게되니 조운과 진도가 적합하겠죠.차 : 관우/장비
편성한 이유
차는 병과중에 전차를 말합니다. 관우와 장비의 경우는 장기판에서 차가 갖는것과 같은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가졌죠. 또 차가 굽히지 못하고 일직선으로 밖에 나아가지 못하는 약점이 있듯이 관우와 장비에게도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이 있죠. 많은 면에서 관우와 장비가 차에 어울린다고 생각이 됩니다. 더해서 장비는 촉군의 전차를 담당하는 거기장군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마 : 마초/마대
편성한 이유
마는 말그대로 말을 의미하며 전쟁에서 기병을 상징합니다. 촉에서 기병을 가장 잘 다루는 장군으로는 서량출신의 마초가 있죠. 또 마초는 촉의 기병을 담당하는 표기장군이었죠. 마대 역시 마초의 종제로 마초와 함께 촉에서 유일하게 기병을 다룰수 있는 장수죠. 그러니 마초,마대가 가장 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요. 성도 같은 마...상 : 위연/황충
편성한 이유
상은 장기를 둘때에 가장 먼저 앞에 섭니다. 즉, 전투시에 선봉대장으로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촉에서 항상 군을 이끌고 선봉에서 서서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격하는 촉장이 누가 있을까요? 바로 위연과 황충이죠. 위연의 경우 한중이라는 촉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최전방을 10년이상 수비했고 황충은 정군산 전투에서 선봉에서 서서 하후연을 참살하고 승리를 이끌어내죠. 따라서 위연과 황충이 상에 적합하다고 봅니다.궁 : 유비
사 : 제갈량/방통(사망시 법정)
편성한 이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듯 하네요. 삼국중 최약체국인 촉을 위,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낸 정치가 제갈량과 군략적 기질이 뛰어난 방통 혹은 법정이 제갈량과 나란히 유비를 보좌한다면 그야말로 최강의 조합이겠죠.한(위나라)
졸 : 우금/이전/악진/조인/조홍
편성한 이유
사실 이들을 졸에 놓기에는 좀 뭣하지만 위에는 기라성 같은 명장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곳에 배치했습니다.포 : 전위/허저
편성한 이유
전위와 허저는 조조의 호위무장입니다. 촉의 조운과 비견되는 인물들이죠. 항상 조운이 유비를 수행했던것처럼 전위와 허저도 늘쌍 조조를 호위하면서 때때로 작전에 투입이 되어서 공적을 세웠죠. 그러므로 이곳에 배치했습니다.차 : 하후연/하후돈
편성한 이유
하후씨 역시 촉의 관우,장비처럼 조조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인물들이죠. 바로 조조친가의 종제들입니다. 특히 하후돈의 경우는 조조가 그 어떤 부하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대우를 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 조조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오랜 심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지위는 촉에서 관우가 장비가 갖는 그것과 동일하죠. 하후연의 경우는 역시 친가의 혈족이라 남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장기판에서 차가 신출귀몰하는 움직임을 갖듯이 하후연 역시 전쟁에서 특기가 급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하후연은 사흘에 5백리, 엿새에 1천리를 간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죠. 따라서 차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되네요.마 : 장료/장합
편성한 이유
역시 위에서 기병대를 이끌수 있는 장수로는 장료와 장합이 있죠. 장료는 내몽골 지역의 병주출신으로 기마에 능합니다. 장합 역시 북방출신으로 말을 잘 다루죠. 이외로 호표기라는 특수기마대를 통솔했던 조순도 있습다만 비중으로 볼때 장료와 장합에 못 미친다고 판단됩니다.상 : 서황/등애
편성한 이유
서황은 위에 있어서 세운 공적이 대단하죠. 번성 전투시 10겹이나 되는 참호와 방호벽을 뚫고 적을 물리치는 전례는 없었다며 조조는 감탄하여 7리까지 마중을 나갔죠. 이로 보아 그의 돌파 능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장기판에서 상이 긴 공격 거리를 자랑하기 때문에 여러 방해물도 가볍게 통과하죠. 따라서 서황의 능력이 알맞다고 생각되네요. 등애는 스스로 별동대를 조직, 이끌고 7백리를 행군하면서 산에 굴을 파서 길을 내고, 계곡에 다리를 놓고, 양모 포대로 몸을 싸서 계곡을 굴러 내려가며 결국 촉을 점령하게 되죠. 그 험난한 장애물도 통과하는 능력과 손수 선봉에 서서 작전에 임하는 능력이 장기판의 상에 알맞다고 생각됩니다.궁 : 조조
사 : 순욱/곽가(사마의는 '진'이라서 제외)
편성한 이유
두 모사의 성격상 순욱은 촉의 제갈량과 비슷한 성향을 지녔고 곽가는 방통의 이미지와 비슷합니다. 내정적인 측면과 후방보급에 순욱, 전장을 전전하며 전략과 계책을 짜내는데 곽가가 적격이죠. 역시 궁극의 조합이라고 생각됩니다.